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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05-20 02:34:23, Hit : 1553, Vote : 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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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퍼온글-[이사람의 삶] 만화영화 사랑 30년

97년경 기사지만 비교적 자세한 김청기감독님 정보가 있는 기사라 등록합니다





『달려라 로보트야…』

    이땅에서 70~80년대 유년시절을 보낸 이라면 누구라도 이 노래에 깃들인 유년의 향수를 기억할 것이다. 『마징가제트』와 『매칸더 브이』 같은 일본산 로보트 만화영화들 이 공전의 인기를 누리고 있던 70년대 중반, 혜성같이 등장한 『로버트 태권브이』의 김청기감독(57).

    『로보트…』는 국내 최초의 극장용 만화영화 『홍길동』(67년 신동헌 작) 이후 우리 창작 애니메이션이 9년만에 거둔 호쾌한 결실이었다.

    와이드스크린으로 움직이는 만화를 즐긴다는 사실 자체가 아직 생경하기만 했던 당시, 이 작품은 76년 12월13일 개봉돼 3주만에 28만5천명의 관객을 동원하는 방화사상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다(흥행기록 연감 집계). 3천석이 넘는 대한극장 객석은 입추의 여지없이 메워지고 최단시일 최다관객 동원 기록을 세우며 전국 동시개봉에 돌입, 전국적으로 「태권브이」 열풍을 일으켰던 것이다.

    『똘이장군』 『우뢰매』 시리즈는 『로보트 태권브이』 시리즈의 명성을 이어받으며 70년대 후반 한국 애니메이션 제작 붐을 주도했다. 「박토」상태였던 국산 애니메이션 시장에 가능성을 제시한 영화들이었다.


권토중래 위한 만화촌 골짜기

    전북 완주군 동상면 신월리 166 마당목. 사방이 온통 산으로 둘러싸인 깊은 산골인 이곳은 김청기 감독이 그의 전속 애니메이션 사단 『스톤벨(Stone Bell)』멤버 70여 명과 침식을 함께 하며 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만화영화촌이다.

    전체 부지 1천9백여 평에 이르는 이곳엔 필름현상과 편집 더빙을 제외한 연출 원화 동화 선화 채화 배경작업 레이아웃 거기다 촬영까지 전 공정을 소화할 수 있는 시스템과 전담팀이 구성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는 종합애니메이션 스튜디오(1백80평)가 있다. 「스톤벨」이란 이름은 시류에 뇌동하지 말고 돌 같은 마음을 갖자는 의미로 민담 「돌종이야기」에서 따왔다.

    올여름 개봉을 앞두고 막바지 제작에 분주한 스톤벨 사단의 프로젝트는 『임꺽정』. 이곳에 처음 터를 잡던 95년 6월 작업을 시작해 이제 전체공정의 30% 정도를 남겨두고 있다.

―91년 『바이오맨』의 흥행실패 이후 근황을 궁금해하는 이들이 많았는데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lennono:바이오맨은 88년 작품입니다...)

『5~6년간 제작일선에서 사실상 손을 떼고 기획 일을 좀 했습니다. 사업에 실패하고 낙향했다고나 할까요. 지난 몇 년간 힘들기도 했지만 심기일전해 제작의욕을 가다듬을 각 오로 고향인 이곳에 내려왔습니다. 이곳 마당목은 아는 사람이 소개해준 공간인데 제작하기에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어 신인시절로 돌아간 기분으로 제작에 몰입하고 있습니다』

    『임꺽정』은 순수만화영화로선 김감독의 통산 32번째 작품.

―재기작품을 『임꺽정』으로 잡으신 특별한 연유라도 있습니까?

『임꺽정, 홍길동은 만화영화의 영원한 테마입니다. 행적 자체가 드라마틱할 뿐더러 박진감도 있고,영국의 루팡처럼 공공선을 위해 존재한 인물이라 메시지도 건강하지요. 93년도에 시나리오를 완성해 씨름선수 이만기씨를 주인공으로 실사영화로 만들려고 했는데 잘 안됐습니다. 그후 한동안 묵혀뒀다가 다시 작업하게 됐습니다』

    만화영화 『임꺽정』은 소설이나 드라마와는 사뭇 다르게 제작되고 있다. 원작의 큰 흐름만 땄을 뿐 만화적인 상황으로 전부 각색된 것이다. 원작에 없는 암행어사가 등장하 는가 하면 가족용 영화로 흥미위주의 선정적 에피소드들이 정리되고 아이들을 위한 캐릭터 「흑돌이」도 등장한다. 콩알을 입에 물었다 확 뱉어내 꿩도 맞혀 떨어뜨리는, 모 두가 좋아할 요소를 고루 갖춘 인물이다.

―스토리 창안이라든가 콘티 작업을 위해 전담작가를 따로 두고 계십니까?

『전적으로 혼자 작업하고 있습니다. 「태권브이」 때 지상학씨하고 공동작업한 걸 빼면 「똘이장군」 「태권브이 2탄」 「우뢰매」까지 혼자 했습니다. 만화의 속성, 특징을 아는 데다 직접 그림을 그릴 수 있으니까요. 만화를 아는 시나리오 작가도 드물고요. 만화 특유의 과장법 꿈 등을 적절하게 알아야지 드라마기술만으로 써서는 안되거든요. 다만 조수들 가운데 젊은 세대가 많아 콘티가 나오면 복사해 돌려보는 등 여러 통로로 모니터링을 하지요. 미처 생각지 못했던 부분들,신선한 창안들도 적잖게 나옵니다. 나는 전통적인 룰만 이용하려 애쓰는데 그들은 엉뚱한 아이디어나 에피소드들을 막 쏟아내요』

    그는 단행본 작가로 만화계에 입문했다. 서라벌 예대에서 유화를 전공하고 졸업후 5년 남짓 『강강수월래』 『삼총사』같은 작품들을 그렸다. 이범기 김산호 등 국산만화 1세대들이 당시 그와 함께 활동했던 이들.


만화작가에서 감독으로

    작가생활을 하던 60년대 중반 극장에서 월트디즈니사의 만화영화 『피터팬』과 『백설공주』를 보면서 엄청난 감흥과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너무나 환상적이고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세계였습니다. 머릿속을 맴도는 오묘한 상상력을 화면에 옮겨놓기까지 그들이 손끝으로 빚어낸 판타지는 정말 대단했어요. 내 평 생에 그런 영화를 꼭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지요』

    그때까지 그는 늘 「얏!」 「핏!」 「창!」 같은 효과음을 글로 써서 표현하거나 움직임의 리얼리티를 극대화하기 위해 간선이나 효과선 등을 대용물로 이용했는데 그 모든 걸 「일거에 처리해버리는」 만화영화는 그에게 「멋진 신세계」 그 자체였다.

    그 무렵 TBC에 『황금박쥐』 등 만화영화시스템이 생기면서 함께 단행본 작업을 하던 동료들과 함께 김씨는 그리로 들어갔다. 그러나 일본 후지 TV의 『황금박쥐』 제작에 참여했던 김씨는 석달만에 당시로선 손꼽히는 직장이었던 동양방송에 사표를 던지고 나온다.

    『재미가 없었어요. 일본원화를 그대로 들여와 국내 하청인력들의 동화작업을 거쳐 TV로 내보내는 거였는데 일 자체에 대한 회의가 컸습니다. 실제처럼 리얼한 감정표현이라 든가 동작, 액션을 그리면 그림커트가 많이 들어가야 되는데 몇 매로 끝나야 하는 여건 때문에 맘대로 그려넣을 수도 없고, 애써 그려넣으면 위에서 빼버리고… 아, 이건 아니 로구나,이건 연기도 애니메이션도 아닌, 단지 기계만화다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안방용 영화가 아닌 와이드스크린의 매력을 포기할 수 없었던 김씨가 옮겨간 곳은 만화영화제작회사인 「세기상사」. 이곳에서 그는 『홍길동』의 후속작으로 『손오공』 『보물섬』 『황금철인』 같은 영화를 만들어냈다.

    『얼마든지 하청작업을 할 수 있었지만 몇푼 벌기 위해 그 작업을 계속하는 건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습니다. 관객 반응도 알 수 없는 남의 나라 작품을 할 이유가 없었고 제 작품을 하고 싶었죠. 막말로 세끼 밥만 먹을 수 있다면 외국작품은 안하고 싶었어요』

    그가 이런 결심을 굳히던 70년대초, 스티브 한과 넬슨 신 등 재미 애니메이터들과 일본에서 쏟아져들어온 하청 애니메이션 물량들은 척박한 국산 애니메이션 시장을 잠식해 들어왔고, 급기야 전체 규모의 80% 이상을 하청시스템화하기에 이른다. 무수한 기능인력이 양산되었고 『이 바닥에서 1년만 원화 그리면 집 사고 논 산다』는 말까지 나돌 정도로 제작사들이 호시절을 구가하는 사이 국내 애니메이션 업계는 급속히 보세 가공기지화 하는 길을 치달았다.

    국내 하청작품 1호인 『황금박쥐』와 『요괴인간』 이래 최근의 『은하철도 999』에 이르기까지 미·일의 「주문공장 겸 대리점」이라는 오명을 안게 된 것. 『홍길동』의 후속타들이 새로운 면을 보여주지 못해 깨지고, 텔레비전 보급과 함께 TV용 만화영화 제작에 불이 붙으면서 극장경기는 급격히 퇴조, 극장용 만화영화는 70년대 들어 사실상 중단되기에 이른다. 김씨가 영화메커니즘에 대해 집중적으로 고민하고 연구하던 시기가 이때다.

    『「태권브이」를 하기 직전까지 몇년간 문화영화사에 들어가 영화 수업도 받고 경부선 기록영화 현장을 찾아다니는가 하면 롯데 「라면땅」이니 삼성제약 「판토」같은 상업용 애니메이션 필름도 만들었습니다. 유현목감독의 소형영화 동호회에도 참여해 영화수업에 대한 연구도 하고…』


마징가 제트 KO시킨 태권 로보트

    그렇게 영화제작의 기본기를 닦은 끝에 나온 김감독의 첫 극장용 장편 만화영화 『로보트 태권브이』는 홍길동 이후 10년 가까이 이렇다 할 작품 없이 침체와 소강 일로를 달리던 국산 만화영화 시장과 극장경기를 되살리는 기폭제 역할을 했다.

    감독생활 30년을 통틀어 김씨 최대의 히트작이자 데뷔작인 『로보트태권브이』에 대한 세간의 반향은 엄청났다.

    『개봉 날, 그 추운 날씨에도 대한극장에서 저 뒷편 한국의 집까지 몇 시간을 기다리고도 못보고 돌아간 이들이 부지기수였죠』

    그땐 『정말 세상이 콩알 만하게 보였다』고 김씨는 말한다.

    『젊은 나이에 무수한 선배영화감독들을 제쳤다는 자신감도 들었고, 한편으론 그분들께 죄송스럽기도 했습니다』

    『스타워즈』와 비슷한 시기에 개봉됐는데 개봉관이 미어터지는 광경은 신예감독인 그의 자부심을 한껏 북돋아주었다. 권선징악과 승부욕만 심어주는 사무라이형 로보트 『마징가』에 물든 당시 아이들을 위해 궁리 끝에 만들어낸 태권로보트가 엄청난 환호를 받은 것이다. 기계로보트 태권브이는 당시 신흥공업국가로 막 도약하고 있던 이땅의 무수한 어린이들로 하여금 이후 전자산업의 주역, 첨단공학의 전사로 자라게 했다.

    태권브이의 기술은 사실 당시의 수준을 몇단계 뛰어넘는 것이었다. 효과음향을 맡았던 김벌레씨는 한국적인 맛을 내기 위해 징과 아쟁 소리를 이용해 로보트가 날아갈 때의 효과음을 믹싱해내는가 하면 단순히 움직이는 만화가 아닌 살아움직이는 느낌을 극대화하기 위해 실제 배우의 동작을 라이브 액션으로 촬영한 후 작화로 일일이 분석해 애니메이션화하는 로토스코핑 기법을 도입했다.

    『로보트의 액션은 태권도 시범동작을 기초로 작화했습니다. 그러니까 태권 동작, 모션, 하나하나가 아주 리얼했지요』 당시 이 영화의 액션이 얼마나 정확했던지 항간에는 김감독이 유단자라는 말까지 나돌 정도였다.

    음악과 동작도 잘 맞았다. 주제가와 삽입곡을 미리 작곡해 그 박자에 맞춰 동작을 그린 덕분에 음향과 화면이 잘 들어맞았다. 인조인간 메리의 테마는 팀 라이스의 음악을 능 가한다는 평을 받았고, 우리 귀에 익은 태권 브이 2탄의 음악은 서라벌 레코드사를 통해 기록적인 오리지널 사운드트랙 판매량을 기록하는 등 종합 영상물로서도 완성도를 인정받았다.

    인물설정도 참신했다. 태권브이의 「마사오」같은 경우 태어날 때부터 악인으로 설정된 「파란 해골 13호」류의 평면적 기계적 악인이 아니라 악인으로서 자기정체성을 갖고 있는 현실적이며 삼차원적인 인물. 생명력을 부여받은 캐릭터라는 점에서 진일보한 전형을 제시했던 것이다. 무조건적으로 박살내야 하고 죽어야 마땅한 마징가제트류의 악한이 아니라 「이유있는」 악한, 고뇌하는 악한의 첫 등장이었다.


불발로 끝난 태권브이의 신화

―인기가 천정부지였으니 돈도 상당히 버셨겠군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돈은 되놈이 먹고 재주는 곰이 넘은 격」이었습니다. 그땐 제가 흥행을 잘 몰랐어요. 극장이 계약을 해서 필름을 가져가면 흥행수입에 따라 일정 지분을 배당해야 하는데 일일이 확인할 수도 없는 거고…. 그래서 대성공을 하고도 제작 당시 들어간 돈 때문에 오히려 집까지 잡혔어요』

    집을 담보로 남의 돈을 끌어대가며 『죽을 둥 살 둥』 만든 첫작품이 그에게 안겨준 것은 화려한 성공의 팡파르에 비해 너무나 보잘것없었다. 당시 음악을 맡았던 최창권씨(서 울예전 실용음악과 교수)는 태권브이의 사운드 트랙으로 그 전에 『살짜기 옵서예』 같은 뮤지컬로 진 빚을 갚았을 정도였으니 감독인 김씨의 경우 떼돈을 벌었을 법도 하건 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못했던 것이다.

    『그후 흥행시스템을 알고나서는 돈도 꽤 벌었습니다. 그렇지만 흥행이란 게 묘해서 몇작품 해서 좀 벌어놔도 한 작품이 안되면 그땐 또 왕창 가는 거죠』

    이 과정을 거쳐 그는 그때만해도 생소하던 지적 재산권 개념을 자각했고 만화영화하면서 캐릭터사업으로 돈을 번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슈퍼태권브이」로 완구업계쪽에서 2천만원을 받았어요. 82년도에 그 돈이면 당시 최고시세이던 은마아파트 한 채를 살 수 있었죠. 당시는 캐릭터나 저작권이라는 개념도 없었을 때라 영화가 좀 뜬다 하면 너도나도 캐릭터를 무차별하게 써먹고 도용하기 일쑤였습니다. 뭘 몰랐던 태권브이 1탄 때는 하다못해 딱지에서부터 가방 운동화 티셔츠 등으로 돈방석에 앉은 사람이 부지기수였어요. 그러다 「로보트태권브이 2탄」부터는 제가 제동을 걸기 시작했죠. 그렇게 해서 87년 「우뢰메 1탄」 때는 캐릭터 사용료만 1억을 받았습니다. 제작비보다 많은 돈이었죠』

    그러나 안타깝게도 『로보트태권브이』의 경우 원판필름이 현재 미국업자에게 넘어가 있는 상황이다. 제작에 참여했던 동료가 필름 수출과정에서 뭘 모르고 원판을 통째 넘겨버린 것. 『믿어지지 않을 만큼 무지했던』 영세 시스템 탓에 남의 손에 넘어간 『태권브이』 상중하 3편 오리지널 필름은 현재로선 다시 넘겨받을 길이 없다.

    『페스티벌이다 뭐다 전시할 때마다 늘 사용권 때문에 전화 걸고 그러는데 그럴 때마다 땅을 칩니다. 러닝타임 1시간 20분을 1시간짜리로 재편집해 미국 내에서 짭짤한 장사를 했다고 그러더군요』


성공과 실패의 엇갈림

    태권브이는 70대말까지 모두 3편이 제작되었다. 그러나 1탄의 성공에 자신감을 얻어 공들여 만든 2탄은 1탄에 못미치는 반응을 얻었고 김씨는 제작비 절감과 흥행을 위해 조금씩 상업주의 제작자로 변신하게 된다.

    『로보트태권브이』의 뒤를 이은 것이 『똘이장군』시리즈. 금강산에 살던 똘이가 동물들과 땅굴을 파 대한민국으로 남하한다는 동화같은 스토리의 이 작품은 당시 땅굴사건의 붐을 타고 한동안 인기를 끌었다. 「기획」이 낳은 상업적 성공이었다. 과학물, 금속성에서 동화적 캐릭터로 옮겨 갔지만 그의 성공은 그러나 그다지 길지 않았다. 80년 초 개봉된 똘이장군 시리즈 중 『꼬마어사 똘이』는 TV 컬러방송이 시작되면서 흥행참패를 기록했다. 극장으로 향해있던 관객들의 호기심과 욕구가 안방에 등장한 컬러텔레비 젼으로 집중되었던 탓이다. 『꼬마어사 똘이』는 그때까지 김씨의 작품 중 최하위 흥행성적을 기록한 채 막을 내렸다.

    사회변화의 탓도 있지만, 기획면에서 아직은 우리 전래동화가 먹히지 않을 때라는 결론을 내린 그는 한동안 우리 전래동화 쪽은 건드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후 다시 작품제작에 몰두하면서 내놓은 『공룡 백만년 똘이』는 꼬마어사똘이로 본 손해를 만회해주면서 만화영화시장에 공룡시대를 열었다. 거기다 태권브이의 또다른 버전 『슈퍼 태권브이』가 효자노릇을 했다.

    여기에 만화애니메이션과 실사를 합성한 『우뢰매』시리즈(12편까지 제작)의 히트도 가세했다. 순풍에 돛단 듯한 시기였다. 이때 번 돈으로 그는 「서울동화」라는 이름의 독자적 영화제작회사까지 설립하기에 이른다.

    『승률로 치자면 8할대였습니다. 80년대 7,8년동안은 특히 일년에 꼭 두 작품씩 겨울·여름 방학에 개봉했는데 세개 만들면 두 개는 손해보지 않고 돈을 벌었으니까요. 「우 뢰매」(87개봉)는 세종문화회관 무지개극장등 여러 소극장에서 동시개봉됐지만 대한극장에 붙었던 스필버그 사단의 「구니스」를 완전히 압도했어요』

    외국작품들이 완성도는 높지만 우리나라 관객에겐 또 그 나름의 정서가 있다는 것, 그 정서에 맞게 잘 만들면 관객은 들게 돼있다는 것을 그는 이때 깨달았다고 한다.

    『그동안 모은 돈으로 80년말, 스필버그 사단처럼 완성도 높은 SF물에 도전할 양으로 오산에 스튜디오 부지를 샀습니다. 극장 설움을 하도 받아서 만화영화 전용극장으로 쓰려고 잠실 부근에 소극장도 만들고 월간 「우뢰매」라고, 애니메이션 전문 잡지도 발간했어요』

    만화영화팬들의 폭넓은 사랑을 받던 잡지 『우뢰매』는 좋은 반응에도 불구하고 광고채산이 맞지 않아 2년만인 90년 2월 문을 닫고 말았다. 우뢰매의 폐간 후유증으로 가슴 을 앓을 무렵 엎친 데 덮친 격으로 88년 잠실에 3억원을 들여 만든 3백석 규모의 올림피아소극장 역시 때마침 불어닥친 극장 경기 불황과 맞물려 1억8천만원을 손해본 채 보증금만 건지고 역시 2년만에 문을 닫았다. 보통의 경우와는 거꾸로 그의 경우 『영화에서 번 돈을 다른 데서 모조리 털어먹고 만』 것이다.

    이무렵 거듭된 실패 속에서 그는 작품활동을 사실상 중단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엄청난 빚과 함께 실의에 빠졌다. 설상가상 본업인 영화제작도 부진을 면치 못했다. 올림픽 이후 가정용 비디오가 급속히 확산되면서 『우뢰매』와 비슷한 일본의 『프레쉬맨』이 비디오 시장에 매주 한편씩 나와 못견디고 간판을 내린 것이다. 『앞이 안보이던, 참 막막한 시절』이라고 그는 이 시기를 회고했다.

    만화영화 감독으로서는 이제 끝났다는 절망에 빠져 사촌동생 김춘범씨의 명의로 「범 프로덕션」이라는 비디오 영화사를 설립하고 싸구려 에로영화를 찍으며 충무로 바닥을 전전하던 그에게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기회가 왔다. 당시 『머털도사』시리즈로 재미를 본 신원동화가 후속작의 흥행실패로 기자재들과 일부 제작파트를 양도한 것이다. 그는 당시 이것들을 매입,방배동 신원빌딩 2층에 입주했고 「김청기필름」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만화영화 제작에 뛰어든다.

    그러나 그해 겨울 의욕적으로 제작한 재기작 『돌아온 우뢰매』는 특별출연한 천하장사 이봉걸만 스타로 만든 채 흥행에 참패했다. 90년대 들어 이미 『인어공주』같은 할리우드 메이저 제작사들의 대작 애니메이션을 맛본 관객들이 더 이상 「구닥다리」 만화영화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급속히 변해버린 관객들의 기호와 선진 테크놀러 지, 할리우드 대자본이라는 거대공룡과 한판싸움에 밀려 주저앉고 만 그는 91년 이후 극장용 만화제작에서 완전히 손을 떼게된다.

    공식석상에서 그는 사라졌고 이 바닥 사람들에게 역시 「왕년에 한가락 했던」 인물로 잊혀져갔다. 빚 감당을 못해 잠적했다느니 사고로 실종됐다느니 애니메이션에 대한 절망으로 비관자살했다느니 하는, 확인되지 않은 소문들만이 무성했다. 사라진 그의 등 뒤에서 외국 작품들을 모방한 디자인으로 극장 애니메이션의 수준을 떨어뜨렸다느니 , 박리다매식 저급작품들을 양산하는 상업작가라느니, 개봉되는 작품마다 졸작이라느니 하는 악성 루머와 오명이 무책임하게 떠돌기도 했다.


백년 후에도 사랑받는 만화영화 만들터

―어찌보면 참 극적이고 부침이 심한 세월을 살아오셨는데 칠전팔기의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겁니까?

『제 나이가 이제 쉰일곱인데도 감성 연령은 40대 초반 정도에 머물러있는 느낌입니다. 초등학교 4,5학년 정도의 감성부위가 있어요. 지금도 작업하는 시간이 제일 행복하죠 , 잡념도 없고… 애니메이션의 원뜻도 그렇지만, 그림을 손으로 그려 움직이게 만든다는 것은 생명을 부어주는 거나 마찬가지거든요. 원화 하나하나를 다 그리고 거기다 색깔을 입혀 치장하고 소리를 덧씌우고 음악을 입히고 성우의 목소리를 깔아넣고… 이런 과정 하나하나에 희열을 느낍니다. 이때문에 30년이 넘도록 아직 일에 대한 회의란 걸 느껴 보지 못했어요. 일이 꼬이고 실패에 봉착할 땐 별생각이 다들지만 그게 제 인생에 걸림돌이 되진 못했죠』

    「백년 후에 봐도 볼 만한」 동적인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그는 말한다. 그런 면에서 SF는 한계가 있으므로 『임꺽정』이 끝나면 『심청전』 같은 전래동화 가운데 아름다운 소재를 꾸준히 발굴해나갈 생각이라는 것.

―『알라딘』의 고감도 어드벤처나 『인어공주』의 현란한 테크닉, 『라이언킹』의 장대한 서사구조에 길들여진 관객들의 기호에 우리 전래동화가 어필할 수 있을까요?

『우리 고유의 동화를 모두들 진부하다고 생각하지만 그걸 재미있게 바꾸는 게 바로 기술이고 하이테크죠. 웅장한 스케일, 화려한 스펙터클, 말초적 기교들이 범람하는 만화시 장의 틈새를 된장냄새 나는 우리 것으로 한번 치고들어가보자는 겁니다. 승산이 있어요』

    『극 전개라든가 캐릭터 색감 효과를 우리고유의 정서 체계로 녹여내서 만든 작품은 관객이 극장에 앉아서 볼 때 절대 생경하게 느끼지 않는다』고 그는 말했다. 피자에 길들여진 입맛으로는 곰삭은 동치미의 깊은 맛이 자칫 따분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그것을 커버하는 고품위 기술력 확보가 남은 과제라는 것.

    『이즈음의 국산 만화영화들을 보면 전부 너무 현란하고 컬러풀해요. 흙과 볏집이 어우러진, 그런 우리 고유의 맛이 없고 초가집 같은 것도 땅에서 붕 뜬 느낌이죠. 우리 정서에 편안하게 와닿기보다는 세트 위에 얹어놓은 듯한 생경한 느낌인데 그런 걸 제대로 소화해내는 연구가 필요합니다』

    이런 김씨의 생각에 따라 「스톤벨」 구성원들은 이곳 마당목에서 작업을 시작한 이래 「감각을 최대한 배제하는」 훈련을 하는 중이다. 유적답사나 우리문화에 대한 공동 연구도 프로젝트 진행일정에 들어있다.

    『선 하나도 100% 손으로 그립니다. 모두다 컴퓨터 작업을 할 때 우린 아주 전통적으로 가는 거예요. 말 그대로 가장 우리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란 걸 구체적으로 구현함으 로써 차별성,우리만의 경쟁력을 확보하자는 거죠. 우리 것에 대한 감각이 손과 마음에 익어야만 우리 혼을 제대로 담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항아리라면 그 선이나 질감을 알아야 되고, 초가도 짚만 얹는 게 아니라 우리 토속색감이 어떻다는 걸 알아야 돼요. 화면에 재현된 짚신 하나만 보고도 「아,우리 옛 짚신이 저런 모양이었구나」 하고 마음 으로 느낄 수 있게 하려합니다』

    수작업에 대한 김씨의 애착을 다들 이해하기 어려워했지만 이제는 그러한 시스템에 편안함을 느끼고 있다. 세기상사에서 일할 당시 같은 직장에서 만난 아내는, 미래가 불투 명한 창작애니메이션에 매달리는 그를 격려했듯이 지금도 이곳 마당목 스톤벨 캠프에서 대식구의 밥을 지으며 그의 일을 돕고있다. 막내아들 역시 「동화라인」에서 섞여 일하며 에니메이터로서의 기본기를 다지는 중이다.


장밋빛 미래 보이는 만화 영화

―만화시장과 애니메이션 시장의 무국적화에 대한 위기의식이 고조되고 있는데, …우리 만화영화의 자의식 찾기와 국적 회복을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요?

『태권브이가 나오기까지 국내 만화영화 팬들은 너나없이 「우주소년 아톰」(63년 데스카 오사무 작)이나 마징가제트(72년 나가이고 작)에 사로잡혀있던 상황이었어요. 마 징가제트의 국적이 어딘지조차 모르는 이들이 태반이었죠. 그러는 사이 일본만화를 모방하는 작가들이 나오고 애니메이션 세계시장의 재편구도에 따라 미일, 선진제국의 하 청기지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런 역사가 현재에 이르러 국적불명이라는 현실을 초래한 것이죠. 제작자들이 자생력을 찾는 것이 시급합니다. 그리고 아이들의 정신적 문화적 정체성 차원에서 대국적으로 투자하고 각성해야 돼요. 어려서부터 우리문화를 갈고닦지 않으면 커서는 힘듭니다.

단적인 예로, 국가 기간산업체인 포철 축구단의 심볼마크가 아톰이라는 건 정말 기가 막힌 얘기죠. 아톰이라면 전 일본 국민의 마스코트이며 우상인데 통탄할 일입니다. 영상산업은 이데올로기 전쟁이고 문화이데올로기의 전파 수단이에요. 위기의식을 느껴야 합니다』


애니메이션의 메카 될 날은

    국산애니메이션의 현실과 미래를 얘기하던 김씨는 『우리도 이제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아마도 그 때문에 지금까지 그는 현역에서 물러나지 못했을 터이다.

    『태권브이』 제작 당시만해도 팔아먹을 데라고는 극장가밖에 없었는데 지금은 각종 전자매체를 비롯해 CD롬, 비디오 판권, 캐릭터 사업 등 시장여건이 엄청나게 좋아졌어 요. 자본과 기획력만 갖춰진다면 세계시장까지 공략할 만하죠. 월트 디즈니 프로덕션의 TV용 만화영화는 할리우드에서 스토리보드만 가져오면 여기서 원화까지 통째 우리 손으로 다 만들어 세계에 내다 팔고있는 실정이니 기술은 세계수준입니다. 이제는 세계시장을 보고 뛰어야합니다』

―그러자면 하청 시스템이라는 현재의 체질을 극복하고 국제사회에 자리잡을 돌파구가 마련돼야 할텐데…

『현재 외국제품을 하청받는 제작사들이 기획과 스토리 개발·캐릭터 개발을 독자적으로 해야됩니다. 애니메이션 제작을 부동산 투자처럼 여겨서도 안되고 이제 우리 만화 영화의 발전을 위해 오리지널을 만들어야 된다는 거죠』

―오늘날 일본국민들을 「가슴깊이 만화의 강렬한 매력을 이해하는 국민」으로 만들어놓은 건 데스카 오사무 같은 초창기 작가들의 치열한 작가의식과 문부성 애국심의 합작물이라는 얘기도 있는데요.

『일본은 일찍이 영상산업의 고부가가치를 인식하고 초창기인 60년대부터 자국 만화영화 육성을 위해 정책적으로 지원해왔습니다. 애니메이션이 문체부도 아닌 상공부로 업종분류 돼있고 기술개발 자금을 요청하는 작가나 감독에게 부동산 담보를 따지는 우리와는 마인드부터가 달라요. 만화영화는 종합엔지니어링입니다. 최근의 애니메니션인 「아마겟돈」은 마케팅에 성공해 정상적인 금융과 정부의 지원을 끌어냈지만 시스템화에는 실패했지요. 계속적인 시도는 필요하다고 봅니다』

    「한국적 애니메이션의 정체성과 자아찾기」

    이 한가지 슬로건에 지금 그의 온 마음은 집중돼 있다. 난마처럼 얽혀 있는 외래 애니메이션의 강풍 속에서 자기중심을 지키려는 「삐따기」들의 「공동체」, 마당목의 실험 이 이곳을 한국 애니메이션의 메카로 만들 날은 언제 올 것인가.


김희경<자유기고가>



잇뽕 (2005-05-20 23:21:28)  
와.. 김청기 감독님 기사네요..^^ ㅎㅎ 잘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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